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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근의 인문기행]시 '답설(踏雪)'은 서산대사와 김구가 아닌, 이양연의 ‘야설(野雪)’로 확인


‘답설(踏雪)’의 시는 서산대사와 김구가 아닌, 산운 이양연(李亮淵, 1771~1856)의 ‘야설(野雪)’로 확인됐다.
'눈 내린 길 함부로 걷지 마라: 산운집(지은이 이양연, 출판 소명출판)'는 담백한 시어, 뛰어난 발상과 감각, 산운 이양연의 시세계를 엿볼 수 있다. 이 작품집을 통해서 처음으로 확인됐다.
 산운(山雲) 이양연(李亮淵, 1771~1856)은 조선 후기에 활약했던 뛰어난 시인이다.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자는 진숙(晉叔)이며, 호는 임연재(臨淵齋)ㆍ산운(山雲)이다. 평생 변변찮은 벼슬에도 오르지 못하고 삶을 마감했다. 그의 시는 200여 편에 불과하지만 조선의 어떤 시인보다 우수한 시적 성취를 보여주고 있다. 주로 5언 절구와 5언 고시에 특장을 보인다. 전고(典故)를 거의 사용하지 않으면서 담백한 시어를 써서 뛰어난 발상과 감각으로 새로운 시세계를 구축했다. 전통적 한시의 자장(磁場)에서 벗어나 조선적인 한시를 구현했다는 데 큰 의미를 찾을 수 있다.

들판의 눈 野雪

 [1]

 穿雪野中去 눈 밟고 들 가운데 걸어 갈 적엔

 不須胡亂行 모름지기 어지러이 걷지 말아라.

 今朝我行跡 오늘 아침 내가 간 발자국들이

  遂爲後人程 마침내 뒷사람의 길이 되리니. 

 

[2]

雪朝野中行 눈 온 아침 들 가운데 걸어가노니

 開路自我始 나로부터 길을 엶이 시작 되누나.

 不敢少逶迤 잠시도 구불구불 걷지 않음은

 恐誤後來子 뒷사람 헛갈릴까 뒷사람 헛갈릴까 염려해서네.

 

  이 시는 서산대사나 김구 선생의 시로 알려져 있으나 와전된 것이다. 산운의 이 두 편의 시는 내용상으로는 거의 차이가 없다. 이 시는 내용적으로도 불승(佛僧)의 시라기보다, 유자(儒者)의 시로 보인다. 들판에 눈이 수북하게 내렸다. 아침 일찍 어딘가 가야하니 그 눈에 처음 발자국을 놓는 셈이다. 그것이 뒤에 오는 사람의 이정표(里程標)가 된다. 내가 산 삶이 다음 살 사람에게 지침이나 본보기가 된다. 그렇다면 눈 속에 발자국이 금세 사라진다 해도 함부로 살 수 없는 법이다.
 산운이 가는 길은 구름처럼 자취가 없다. 그러나 자취없음이 의미 없는 방기(放棄)나 태만(怠慢)을 뜻하지는 않는다. 눈에 찍힌 발자국도 한세상 지나면 사라질 구름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내 자취는 누군가에게 중요한 하나의 단서가 될 수 있다. 산운의 발자국은 현실과의 끊임없는 대치 속에서 이루어진 궤적이다. 그것은 때로는 슬픔을 때로는 고독을 노래한다. 그것이 발자국이 된다. 산운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말해주지 않는 눈 쌓인 들판에 길을 내듯 낯선 삶과 조우를 한다. 아래 시도 흥미를 끌고 있다.

 적상산에서 산 아래 내리는 비를 보다赤裳山見山下雨

 山下雲雷深 산 아래 구름 우레 잠겨 있으니

人間今日雨 세상에선 오늘은 비내리겠네.

誰家喜田事 밭일 하는 집에선 기뻐할게고

誰家憂遠路 먼 길 가는 길손은 근심하겠네. 

  적상산(赤裳山)은 전북 무주군 적상면에 소재한 산으로 높이 1,038m이다. “이 산은 암벽이 붉고 가을에 단풍이 들면 온 산이 마치 여자가 붉은 치마를 입은 것 같다고 하여 적상산이라 하였다”고 한다. 산 위에서 저 산 아래의 풍경을 바라본다. 산 아래가 잔뜩 구름과 우레에 잠겨 있으니 오늘 빗줄기가 시원스레 쏟아질 것 같다. 다같은 비겠지만 농군에게는 반가운 손님일 것이고, 나그네에게는 귀찮은 불청객일 것이다. 산 위에서 보니 세상사에 일희일비하는 것이 속절없고 부질없다. 비가 오거나 눈이 내리거나 천둥 벼락이 치거나 간에 저 산 위에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아! 그동안 너무나 자질구레한 일들에 얽매여 살아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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