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근의 인문기행]임실 남양수시는 남양홍씨로부터 유래
감나무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담겨있을까. '개똥이나무가 들려주는 이야기(글 이지현, 그림 이택구)'는 아주 오래된 개똥이 감나무가 이 집 사람들의 출생, 관혼상제 등 가정의례를 설명하는 식으로 스토리가 전개되는 책이다. 어떤 집에 태어난 아기를 위해 감나무 한 그루를 심었던 바, 그 아이의 이름이 개똥이였으므로 그 이름을 따라 그렇게 불렸다. 개똥이 할머니는 삼신상을 차려 삼신 할머니께 감사의 인사를 올렸다. 개똥이의 본명은 효원이로 백일을 맞이했다. 개똥이도 자라고 감나무도 쑥쑥 커 지붕보다 높았다. 가을이 되면 감이 주렁주렁 열리면 아이들은 이를 딴다고 다가와 주위를 뱅글뱅글 돌면서 놀았다. 그는 15세에 관례를 올리고, 훗날 곱단이를 신부로 맞이했다. 그후 아이를 낳고 벼슬아치가 되어 나랏일를 돌보다가 회갑 잔치를 열었다. 나이가 되어 죽게 결국 개똥이 감나무만 살았다는 스토리다.
임실군 청웅면 옥전리 명동(椧洞)은 남양수시(南陽水枾)로 유명하다. 명동 주변에 있는 오래된 무덤이 황총이라고 전하는 것으로 미루어 처음 고려말 태사 황호(黃昊) 일가가 살았던 마을이다. 마을 앞 들판은 광활하다. 물이 마르기로 유명해 옛날 조정에서 ‘가랏 만호들 이앙이 다 끝났느냐’고 물을 정도였다고 한다. 명동마을에서 나오는 수시(水枾)는 맛이 좋아 조선 때 조정에 진상되기도 했으며, 가랏수시 또는 남양수시(南陽水枾)로 유명하다. 이곳 감은 1580년대 홍휴(洪休) 즉 남양홍씨의 손자가 문과에 급제해 원주목사를 지내다가 서울에서 감을 재배한 것이 시초로 알려져 있다. 감나무가 기후와 풍토에 적합해 잘 자라 오늘날까지 명성이 이어지고 있다. 전북일보 1981년 6월 17일자엔 1620년대 홍치경(洪致慶)의 아들 홍시태(洪時泰)가 운봉현감에게 수시를 인조에게 진상하고 영의정인 학곡(鶴谷) 김서봉(金瑞鳳)에게 선물하면서 부터라고 나온다. 남양수시를 진상받은 인조로부터 극찬을 받고 토산품으로 궁궐에 들어가게 됐다는 것이다.
1955년과 1957년에는 전북도지사와 임실군수가 오동나무 상자에 150개씩을 넣어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내졌다고 한다. 남양수시는 본래 이곳 명동마을의 옛 이름을 따서 가랏(柯田)수시로 불러오다가 1962년부터 김해과수묘포장과 경남임업시험장에서 접수(接樹)를 끊어다 성공한 후 남양홍씨들이 관향을 따서 이름을 붙여 남양수시로 불렸다. 1983년 홍뇌성의 사진첩에 이 고장의 명물 남양수시목이 보인다. 1981년 150그루였던 수시 감나무는 40년만에 2그루로 줄었다는 김철배 임실군청 학예사의 설명이다. 일제시대엔 일본인들의 수탈을 피하기 위해 감나무를 배고, 또 수확이 적고 수분이 많아 보관하기 힘들어 그 수가 줄게 됐다는 것이다. 지금 임실의 토종감은 무슨 종류의 감나무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