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근의 행복산책] 해우소
산사의 품에 안기면 어느 새, 참사람의 향내가 난다.
템플 스테이는 일상의 피곤함을 털어버리고 몸과 마음을 재충전하려는 속세의 사람들에게 있어 하룻밤을 지내면서 그제서야 해우소의 개운한 느낌을 깨우치게 만든다. 세상살이에서 얻은 부와 지식, 그리고 크고 작은 가슴앓이까지도 모두 훨훨 벗어던지고 비우란다.
비우는 양만큼 근심이 덜어지는 이치와 함께 바지런한 몸가짐이 왜 필요한지 알려주는 목탁같다. 머릿속으로 시냇물이 졸졸 흘러가는 듯 명징한 기운을 느껴본 게 얼마 만인지 기억조차 가물가물하다.
시각을 알려주는 유일한 물건, 휴대전화는 이미 완전 방전 상태이지만 불안함과 안절부절하 속내는 말끔히 사라진다. 승방에서 나올 땐 ‘나 자신’의 어우른개를 깨고 나왔으면 더 없이 좋겠다. 그래서일까, 참나(眞我)를 찾아 떠나는 마음 산책은 이제 막 결혼을 한 신혼부부처럼 달콤하면서도, 또다른 한편으로는 백팔번뇌의 느낌 나로 그 자체다.
조계산 자락 송광사에서 머릿속과 뱃속을 깨끗이 청소한다. 싱그러움 사이를 굽이쳐 흐르는 계곡물과 저 멀리 첩첩이 층을 이룬 먼 산은 안개인 듯 아지랭이인 듯 아른거린다. 절제하지 않고 지낸 행적이 하나둘씩 스쳐 지나가며 그 대가가 결코 만만치 않을 것이란 성찰이다.
해우소는 욕심도 근심도 두려움도 비워내는 곳이다. 뒷간, 똥간, 변소, 측간, 측청, 정방, 통시, 화장실, 그리고 해우소…. 이름도 많다. 그중 가슴에 와 닿는 말, `해우소(解憂所)’. 근심을 푸는 곳이란다. 해학과 은유가 넘치는 이름이다. 내 몸 속 찌꺼기들, 배 속에 쌓인 이 근심 덩어리를 세상으로 밀어낸다. `비움’이다. 하루를 걸러도 어렵고 때를 지체해도 어렵다. 이 비움은 누구나 `반드시 꼭’ 해야 할 일. 지위의 높고 낮음도, 옛날과 지금도 다르지 않다.
가장 평등하고, 보편적인 이 일이 이뤄지는 곳, 해우소다. 지금이야 `다 아는’ 말이 되었지만뒷간에 `근심을 푸는 곳’이란 깊은 이름을 붙인 이는 근대의 선승(禪僧) 경봉(鏡峰 1892∼1982)스님이었다. 6·25전쟁이 끝난 후 양산 통도사 극락암에 머물던 스님은 큰일을 보는 대변소(大便所)에는 `해우소’라 적고, 소변을 보는 곳에는 `급한 것을 쉬어가게 하는 곳’이란 뜻인 `휴급소(休急所)’라 이름붙였다 한다. 선승의 여유와 해학이 넘쳐난다.
생명과 순환의 공간 해우소. 필자는 한국적인 것을 뽑으라고 하면 사찰의 뒷간을 손꼽는다. 다행이 전남 순천의 ‘순천선암사측간’(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214호)과 강원도 영월의 ‘영월보덕사해우소’(강원도 문화재자료 제132호)의 뒷간이 전통 사찰 해우소의 양식을 잘 보존하여 문화재로 지정되었지만, 서구의 화장실에 밀려 사라진 수많은 사찰의 전통 해우소가 지금도 아쉽다. 선암사 화장실은 우리나라 사찰 가운데 아름답고 가장 오래되어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욕심도 근심도 두려움도 비워내는 곳, 해우소에도 `맛’이 있다. 지리산 자락 남원 실상사(實相寺). 해우소 한 칸을 차지하고 앉아서 내다본 작은 창 너머엔 풍경이 가득하다. 청명한 하늘, 빈 나뭇가지에 이는 바람, 어깨를 포개며 끝없이 이어진 산 능선, 앉은 곳이 저 밖과 한가지다. 바람이 훑고 간다. 몸 저 끝에서 올라오는 시원함. 바람 뒤 있어야 할(?) 냄새가 없다. 톱밥이 담긴 통이 놓여진 이른바 건조식해우소. 일을 보고 톱밥 한 바가지를 퍼서 골고루 뿌려주면 된다. 소변은 따로 모아 비료로 쓴다.
끙~. 건너편에서 들려오는 애환의 소리. 바람에 궁뎅이를 씻는 맛도 있고, 바깥 세상도 보고, 코와 눈으로 `내 것’도 확인하고, 옆사람의 애환도 나눌 수 있는 인간적인 맛. 해우소의 맛이다. 이렇듯 즐거운 비움으로 자연과 생명을 지키고 정직과 일상의 수행을 실천할 수 있단다. 실상사 주지 해강(海岡)스님이 들려준 `해우소’의 의미다.
“해우소에서는 똥을 누지요. 뭐 특별한 것이 있습니까? 하지만 지금의 수세식 변소는 `싸는 그 자리만’ 깨끗하지요. `눈 가리고 아웅’입니다. 여과를 한다지만, 결국은 그대로를 내버려 강과 물을 버리는 주된 원인이지요. 땅을 살리고 먹을거리를 살리며 농사짓는 부모님들을 살리고 그 쌀과 채소를 먹는 우리의 생명을 살려내는 길은 똥을 `제대로 대접’하는 길밖엔 없습니다.”
이른바 `문명의 편의성’에 감춰진 이면을 끄집어내는 스님의 말씀. 농약과 화학비료를 쓰기 전까지 뒷간은 우리들의 먹을거리를 키우는 거름을 만들던 `생명의 공간’이었다. 쌀을 비롯해 온갖 농작물들은 결국 똥오줌이 순환된 또 다른 모습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