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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근의 행복산책]쌀독인심


전남 구례군 토지면 운조루(雲鳥樓)의 뒤주의 마개엔 ‘타인능해(他人能解)’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이는 “누구나 뒤주를 열 수 있다”는 뜻으로 양식이 없어 굶주린 마을사람 모두에게 뒤주가 개방되어 있었다고 한다.

 경주 최부자는 ‘사방 백리 안에 굶어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는 원칙을 세우고 소작인에게 8할을 받던 소작료를 1600년대부터 절반만 받는 등 한국판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표상으로 최근 재평가받고 있다.

 호세를 대신 내주며 공동체의 구성원들에게 최선을 다하였던 나눔과 베풂의 모범 정읍 김영채(金永采:1883-1971). 1928(戊辰), 1929(己巳)년은 이 지역에선 '무기(戊己) 대흉년'으로 일컬어지는 대단한 흉년이었다. 2년 연속 흉년이 들다 보니 당장 먹을 양식도 문제였지만, 더 큰 문제는 세금이었다. 그 지역 산외면 면민들은 호세(戶稅)를 낼 수가 없었다. 이때 김영채는 산외면 면민들의 전체 호세를 대신 내주었다.

 김제 민속문화재 제11호 장화리쌀뒤주는 쌀을 담기 위해 만든 대형 뒤주이다. 쌀뒤주인지 모른 채 보면 창고인지 화장실인지 모를 만큼 크기가 상당하다. 이 뒤주는 70가마 정도의 분량이 들어갈 수 있을 만큼 크고 독특한 건조물로서, 집을 찾는 사람들을 소홀하게 대접하지 않았던 당시의 훈훈한 인심을 느낄 수 있는 소중한 민속자료이다.

 1976년 전라북도 민속자료 제11호로 지정된 김제 ‘장화리 쌀뒤주’이다. 1864년(고종 1년)에 정준섭이 만들어 사용한 쌀뒤주인데 작은 정자만한 크기가 예사롭지 않다. 높이 1.8m 너비 2.1m 정방형 목재에 두께 3.3cm의 널빤지를 짜 맞춘 벽체가 초가지붕을 얹은 채 주춧돌 위에 놓여 있다. 그 모양뿐 아니라 커다란 뒤주에는 특별한 사연이 담겨있다. 고종 26년(1889년) 7월 26일자 『고종실록』에 '흉년을 당한 때에 재물을 내어 백성을 구한 전 감찰 정준섭에게 표창하도록 한다'는 기사의 제목으로 나온다. “김제에 사는 정준섭이 큰 흉년을 전후하여 1만 3,000냥의 재물을 내어 죽어가던 백성들이 모두 그 덕에 살아났다. 재산을 아끼지 않고 구제한 액수가 매우 많다. 매우 가상한 일이니 수령의 자리가 나기를 기다려서 조정에서 표창하자는 의정부의 청을 임금이 윤허했다”는 내용이다. 이어 11월 27일자 『고종실록』에 정준섭을 구례현감으로 제수했다는 기록으로 그 사연을 증명해주고 있다.

예전에는 집집마다 뒤주가 있었다. 뒤주는 지금의 ‘쌀통’ 기능만을 한 것이 아니라, 그 집안의 부와 재력을 상징하는 물품이기도 했다. 뒤주가 큰 집일수록 사계절 내내 보릿고개 없이 매 끼니 쌀을 배불리 먹을 수 있었다. 보통 가난한 집에서는 이 큰 뒤주야말로 부러움의 대상일 수밖에 없었다. '쌀독에서 인심 난다'는 말이 있다. 송파 세모녀 사건 등을 통해 알 수 있듯 우리 주변에 도움이 필요한 이웃이 많다. 경제적 어려움으로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는 이웃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취지에서 쌀독을 설치할 수는 없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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