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근의 행복산책]'정승 열 명이 왕비 한 사람만 못하고, 왕비 열 명이 산촌의 선비 한 사람만 못하다'
'정승 열 명이 왕비 한 사람만 못하고, 왕비 열 명이 산촌의 선비 한 사람만 못하다'는 속담처럼 예로부터 선비는 각별한 존재였다.
그래서 우리 역사적 자아의 원형을 선비의 정신에서 찾는 이가 많다. 그러나 '도덕'에 뜻을 둔 고귀한 정신의 선비는 그리 흔치 않았다. 그 선비들의 발자취가 고스란히 살아있는 전주한옥마을이다.
"조선시대 선비들은 향촌에 머물면서 학문을 닦으며 지역사회의 정신적 지주로서의 역할을 했습니다. 마을에 한 두 선비가 대를 이으면서 선비집안을 이루는 것이 조선시대의 일반적인 사회상이었던 것이죠. 하지만 전주는 좀 달랐어요. 선비들이 모여 집단촌을 이루고 있었던 일은 그리 흔한 현상이 아닙니다. 이들이 일제시기에 교동과 옥류동에 모여서 살기 시작한 것은 분명 특이한 현상이었습니다. 그래서 전주를 잘 아는 사람들은 지금도 이곳을 선비촌 또는 학자촌으로 기억됩니다"
전주 선비는 얼어 죽어도곁불을 쬐지 않는다. 선비의 깐깐한 정신을 엿볼 수 있는 말이다.
또 있다.
선비는 물에 빠져도 개헤엄은 치지 않는다. 두 말 모두 선비는 구차스럽게는 살지 않는다는 뜻이다.
전주 최학자 최병심이 생각나는 오늘이다.
'호남 3재(三齋)’는 간재(艮齋) 전우(1841-1922)의 제자로, 근·현대 호남 유학을 대표해온 금재(欽齋) 최병심(崔秉心, 1874~1957), 고재(顧齋) 이병은(李炳殷, 1877~1960), 유재(裕齋) 송기면(宋基冕, 1882~1956)을 말한다. 스승인 간재는 "금재는 나에 못지않은 학자이며, 그의 학문을 조선에서도 따를 사람이 몇 되지 않는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최병심은 일제 식민지배 강화로 우리 정신과 문화적 유산이 말살될 위기에 처하자 이를 계승하고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전주 옥류동(玉流洞, 교동)에 ‘옥류정사(玉流精舍)'란 서당을 열고 자신이 강학하던 곳을 ‘염수당(念修堂)’이라 했다. 일제가 전라선 철로개설을 구실로 한벽당을 헐어버리려 하자 그는 이에 강력히 항거하며 한벽당을 지켜냈다. 그는 일제에 대한 저항의식을 보여주는 '염재야록'의 서문을 썼으며, 이로 인해 시련을 겪기도 했다.
시경 대아(大雅)의 '너의 조상을 생각하지 않겠는가 / 그 덕을 닦으라(無念爾祖 聿修厥德)'라 했듯이 '염수(念修)'는 '조상을 생각하고 덕을 닦으라'는 의미다.
'선비는 차라리 목을 자를지언정 욕되게 해선 안된다'고 했다.
의로운 이가 열사람만 되어도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은 막을수 있었을 것이라는데 지금 우리 사회에 진짜 선비가 절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