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익산군수를 지낸 금마일기(金馬日記)를 살펴보니
익산시와 원광대학교 한문 번역연구소는 조선 후기 익산기록을 담은 ‘금마일기’와 ‘유금마성기’, ‘금마별가’를 번역, 세 번째 ‘익산문헌자료총서’를 발간했다. 금마일기(金馬日記)는 조선 후기 익산군수를 지낸 정규혁의 14개월간 일상이 기록돼 그가 1896년 3월 부임 이후 생활하며 겪었던 다양한 업무처리 내용 등이 기술됐다. 수령으로서 해결해야 할 세금 징수, 아전 관리, 각종 의견 수렴 등을 위해 동분서주하던 모습이 상세히 그려졌다. 이 일기는 또 수령을 도와서 군정을 처리하던 면임과 존동, 통수, 검독, 주비, 풍헌 등의 직책을 내용에 담고 있어 조선 후기 행정의 일 단면을 살펴볼 수 있는 사료적 가치로 평가된다. [편집자]
‘금마일기’에 의하면, 정규혁은 익산 군수를 제수받은 당시 광주군 북방면 성달마을(현 군포시 속달동 속달마을)에 살았는데, 3월 3일 칙서를 받은 후 조상의 묘에 성묘 등 여러 일들을 처리하고, 3월 19일에 집에서 출발, 26일에 익산 동헌에 들어간다. 그리고 실질적인 업무 처리는 3월 28일 문묘를 배향하고 관속들을 점고한 뒤 이루어졌는데, 백성들의 송사가 밀려 있어서 어려움이 많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내용에서 보면, 익산군수로서 정규혁이 실질적인업무를 보게 된 시기는 1896년 4월부터임을 알 수 있다.
‘금마일기’는 내용상 두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1기는 1896년 3월 부임해 그해 12월 3일까지로, 이때는 군정(郡政)과 관련한 각종현안을 해결하기 위하여 열심히 노력하였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2기는 12월 4일 아내가 죽은 뒤부터 다음 해 4월 29일까지이다. 이 기간중 2개월은 장례 시기이며, 2월부터 정무를 보기 시작했으나 이전의 모습을 찾기가 힘든 시기다.
소인규는 부임 초에 가장 먼저 문안을 청한 이후로(3월 30일) 4월까지 8번 만남을 가졌으며, 이 중에 두 차례(4월 7일, 25일)는 반나절 동안 대화를 나누었고, 한 차례는 군수가 저녁에 직접 집을 방문(4월 10일)하여 아주 친근하게 교통하고 있음을 파악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정규혁 군수의 소인규와의 밀접한 접촉은 익산 지역의 가장 명망 높은 가문인 진주 소씨(晉州蘇氏)와의 교류를 두텁게 하려는 의도와 더불어 당시 익산 군정에 대한 각종 정보를 얻기 위한 업무상 이유도 있었을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이때 진주 소씨 문중의 도사(都事) 소진우(蘇鎭禹), 소석두(蘇錫斗) 주사, 소 첨정 등과의 지속적인 교유도 도움이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 중앙정부에서 수령에 대한 평가 기준에 관해서는 수령칠사가 있다. 그러나 수령칠사는 포폄 시 기준으로 삼는 하나의 기준일 뿐이며, 조선 후기에는 수취 문제가 중요한 평가 기준이 됐다. 18세기 중엽 이후부터 부세 수취가 점차 총액제 방식으로 운영되었다. 총액제는 국가가 토지와 백성들을 일일이 파악하지 않고, 담세자나 담세 대상물의 증감과 관계없이 미리 정해진 수취 총액을 도-군현-면리 단위로 공동 부담하게 하는 제도이다.
부세 수취와 관련, 익산군수로 부임한 정규혁이 마주한 가장 시급한 일은 부임 1, 2년 전인 갑오년(1894, 고종31)과 을미년(1895)의 세금을 징수해서 납부해야 하는 일이었다. 부임 초에는 전반적인 상황을 모르기 때문에 정규혁 군수는 당시 담당자였던 김지환 등 이속들에게 의지해 세금 문제를 해결해 보려고 했다. 그러나 효과가 없자, 5월 24일부터 30일까지는 갑오년 세금과 결전 징수를 위해서 독촉 징수뿐 아니라 기한 내 납부 서약서를 받기도 하고, 미납한 백성을 잡아들이는 등 강압책을 사용하기도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갑오·을미년 두 해 전결의 호전을 익산군과 같은 300리 이외 지역은 60일 이내 완전히 청산하고, 이를 어기면 해당 지방관을 면직하겠다.”라는 강력한 훈령이 내려온다. 일기 내용에 의하면, 당시 익산군의 갑오·을미년 두 해 조세 미수 금액은 5만 냥에 가까운 금액인데, 아직 이포(吏逋) 액수도 모르고, 백성들의 실정으로는 독촉해 거둘 수도 없는 상황이라고 어려움을 토로하고 있다.
각종 의견 수렴을 위한 협의체 운영과 민생 안정을 위한 법질서 확립 내용을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의견 수렴을 위한 ‘회의기구’로 활용한 것은 ‘유향회(儒鄕會)’이다. 이 유향회는 ‘향회(鄕會)’와 같은 성격을 지닌 것으로 보인다. 첫째는 재정(災政)과 관련, 재결(災結)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서였다. 재결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 열린 첫 회의에는 40여 명이 참석햇다. 대부분 내용에 수긍하고 문제없이 해결됐다.(7월 18일) 그리고 1897년(광무1) 초에 역시 재결 문제로 유향회를 열었는데, 큰 갈등 없이 여론이 통일됐다.(2월 9일) 두 번째는 사환(社還)을 설치하기 위한 회의로, 이는 1895년(고종32) 갑오개혁 시기에 발표한 이전의 환곡제도를 진휼 중심으로 변화시켜 새롭게 사환(社還)을 설치하라는 사환조례(社還條例)에 따른 것이었다. 이 사환 설치 협의를 위한 회의의 참석자 범위를 넓혀 유향회회원뿐 아니라, 각 면과 각 리에서 존동(尊洞)과 주민이 1명씩 참석하도록 고시(告示)하고 있다.
그가 익산군수로 부임하자마자 밀려든 것은 각종 소송이었다.그 중에는 산송(山訟)이 많았는데, 4월 20일에 영을 내려 산송은 추수가 끝날 때까지 멈추도록 한다. 그러면서 각 면과 각 리의 존동을 뽑는데 “존동은 노련한 사람으로 선발하여 노름을 하거나 이치에 어긋난 송사를 좋아하거나, 술주정으로 다른 사람을 폭행하는 등의 일은 존동들이 엄격히 금지하여 불측한 풍조를 막으라.”라고 고시하고 있다.(4월 24일) 존동들은 위에서 언급한 불측한 풍조를 금지하는 역할을 할뿐만 아니라, 관아에 이름이 기록된 명부를 제출하여 마을에 사건이
발생하거나 소송이 제기되면 참고인 역할을 담당한다. 이를 통해 관내의 질서를 확립하기 위해서 존동들을 활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군수로 정규혁이 익산 지역에서 엄금한 분야는 술주정과 노름이었다. 초창기에는 “술주정을 부리거나 노름을 하면 관용을 베풀지않을 것이다.”라는 지시 내용을 읍내 장날 장교를 시켜 널리 알리고, 이를 거리 벽에 방문을 걸어 붙여 계도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계도에도 불구하고, 술주정하면서 길 가는 사람을 구타하는 일이 발생하자 징역에 처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다시 각 마을에 방문을 붙여 “항산이없으면 항심도 없다. 노름판과 술주정으로 다른 사람을 구타하면 엄중히 다스릴 뿐 아니라 징역살이까지 하게 될 것이다.”라고 재차 고시하여 엄중히 다스릴 것을 강조하였다. 그런데 고시한 다음 날 술주정하고 양반을 구타하는 일이 발생하자, 이 자를 곤장 60대를 치고 징역형에 처하는 엄벌에 처하기도 한다.
2.고종 33(1896년)의 금마일기
[고종 33(1896년) 3월 28일]
향교에 나아가 문묘에 알성(謁聖)한 뒤 관속들을 점고(點考)하고, 이어 공무를 처리했다. 뒷마을에 사는 송(宋)을 채비해 돌려보내면서 집에 보내는 첫 번째 편지를 부쳤다. 백성들의 소송 서류가 잇따라 밀려들었다.
[고종 33(1896년) 3월 29일]
백성들의 청원 서류가 빼곡히 쌓여 있었다. 민간에 의례적인 훈시[例飭]를 발령했다.
[고종 33(1896년) 4월 1일]
질청에 나아가 망궐례를 행하고, 이어 곡반을 하고, 이어 향교에 나아가 알성했다. 청주에 사는 친척 이씨(李氏)가 만나기 위해 찾아왔는데, 머물러자도록 했다.
[고종 33(1896년) 4월 2일]
전주에 있는 감영으로 행차했다. 관찰사 이병훈(李秉勳)이 병환을 이유로 연명(延命) 의식을 생 략해 주었다. 동문 밖에 사는 최광훈(崔光勳) 생원이 찾아와 만났다.
[고종 33(1896년) 4월 25일] 맑음.
백성들의 소송이 몰려들었는데, 가뭄이 심해서 봇도랑의 물을 놓고 서로 싸우는 소송이 매우 많았기 때문이다.소(蘇) 생원이 만나기 위해 찾아와, 반나절 동안 편안하게 접견했다.
[고종 33(1896년) 5월 8일] 가랑비가 하루 종일 내림
부득이 하루를 더 머물러 잠을 잤다. 전주 최(崔) 서방과 이(李) 참봉이 찾아와 만났다. 전주는 모기가 극성이라고 일찍이 들은 바가 있는데, 과연 빈말이 아니어서 또한 잠을 잘 수 없었EK
[고종 33(1896년) 5월 10일] 맑음.
구타사건으로 인한 백성의 소송이 있었다. 그곳 마을의 존동에게 실상을 조사할 일로 고시했다. 공생(貢生) 김순형(金順炯)과 서학선(徐學善)에게 각각 태형(笞刑) 20대를 때린 뒤 공생 명단에서 삭제했다. 공생은 곧 통인(通引)이다.
[고종 33(1896년) 5월 14일] 맑음.
소석두 주사와 일유사 소인규가 만나기 위해 찾아왔다. 전주부(全州府) 연신당(燕申堂) 유(柳)주사의 답서(答書)를 보았다, 관찰사는 환후 때문에 답장할 수 없었다고 하였다. 동헌(東軒)을 보수하는 일과 관련하여 편지를 주고받은 것이다.
[고종 33(1896년) 5월 17일] 흐리고 구름이 낌.
오늘은 읍내에 장이 서는 날이다. 술주정과 노름을 금지한다는 일로 일찍이 대소의 백성들에게 단단히 타일렀으나 술주정을 부리며 구타했다는 소송이 여전히 있었기 때문에 다시 엄중하게 타일러 깨우치게 했다. 그리고 “단비가 내렸으니 대소의 백성들은 게으른 마음을 먹지 말고 농사일에 부지런히 힘쓰고 각자의 생업에 만족하며, 술주정을 부리거나 노름하는 곳에 드나들지 말라. 뒷날 만약 염탐(廉探)에걸렸을 때에는 반드시 관용을 베풀지 않을 것이니 모두 잘 알기 바란다. 이러한 금지사항을 범하지 말아 뒤에 후회하는 단서가 없도록 하라.”는 내용으로 장교를 시켜 시장의 대소 민인들에게 깨우쳐 알린뒤 거리 벽에 방을 걸어 붙이게 했다.
한밤중에 비가 갑자기 쏟아져 아침까지 계속되었는데, 장마철이라고 할 정도였다. 매우 괴로웠다.
[고종 33(1896년) 6월 8일] 아침에 비가 내리다가 이어 흐림.
진상(進上)에 쓰이는 대나무를 매우 시급히 사들이기 위하여 첩선장(貼扇匠)이 도착하였고 훈령도 내려왔다. 이에 각 대나무 밭주인들에게 즉시 매매하라는 뜻으로 고시하였다. 이것은 예봉(例封)하기 위한 일이라고 했다.
[고종 33(1896년) 6월 9일] 아침 비에 이어 큰비가 내림.
돼지를 밖에 놓아기르지 못하도록 군내면의 각 마을 동장들에게 분부했다. 만약 돼지를 놓아기르는 자가 있으면, 해당 돼지는 즉시 타살하고 그 주인은 곧바로 잡아 바치라는 내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