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제일성 '풍남문'
전주시 완산구 풍남동 3가 67-5
전주성(全州城)은 삼남지방에서 가장 큰 성이었다.
북쪽에서는 평양과 함흥, 남쪽에서는 전주와 대구 성곽의 규모가 컸는데, 대구성은 전주성의 3분의 2정도에 불과했다. 현재 추정해본 성벽 내부의 면적은 약 72만㎡(22만평)이다.
관찰사의 소재지였던 전주에는 시가지를 둘러싼 성곽이 초기부터 있었으며, 그 성곽에는 동서남북에 각각 문이 있었다. 성내부의 중심 건물로는 객사와 전라감영, 전주부영이 나란히 배치됐다.
‘풍패지관’ 현판으로 유명한 객사는 ‘영빈관’이었다. 감영에는 도의 행정을 총괄하는 전라감사(도지사)가, 부영에는 전주부의 행정을 책임지는 전주부윤(전주시장)이 있었다. 이들은 모두 종2품으로 동급이었는데, 임진왜란 이후에는 한 관리가 겸직하는 경우가 많았다.
전주성은 고려말 전라도 관찰사 최유경이 창건했다고 한다. 그후 1597년 (선조 30) 정유재란으로 성곽과 성문이 모두 파괴됐다. 1734년(영조10년) 관찰사 조현명이 성벽을 크게 고치고 4대문을 설치했다. 남문의 이름을 명견루(明見樓)라 했다.
그러나 1767년(영조 43)의 대화재로 불타 이듬해 관찰사 홍낙인이 재건하고 ‘풍남문’이라 했다. 1907년 일본에 의해 도시계획의 일환으로 성곽과 성문을 모두 철거함으로써 풍남문만 남게 됐다.
그 후 종각, 포루 등이 일부 헐리는 등 원형(原形)이 훼손되었으나 1978년부터 3년간의 보수공사로 옛 모습을 되찾았다. 풍남문은 팔작(八作) 지붕의 겹층 누각으로서, 아래층에 세운 높은 네 개의 기둥이 위층에서 가장자리의 기둥을 이루는 한국 성곽 건축에서 흔치 않는 기둥배치이다.
조선 후기 문루의 대표적 건축양식이라고 할 수 있다. ‘풍남문’이란 이름은 중국을 처음 통일했던 한 고조 유방의 고향인 풍패(豊沛)에 빗대어 태조 이성계의 관향(貫鄕)인 전주를 ‘풍패향’이라 부른 것에 기인한다.
전주부성 가운데 남쪽 성문을 풍패향 전주의 남문이란 뜻으로 풍남문이라 했다. 4대문 중 유일하게 현존하고 있다.